감사의 말씀-이항증
1부 그는 누구인가
석주 이상룡 선생을 찾아서
국가 위난기에 임청각에서 태어나
2부 교육, 성장 시기
과거낙방, 일본침략 나날이 심화돼
대한협회 안동지회조직 일제에 구속
의병지원에서 계몽운동으로
3부 국치와 망명
국치로 절망, 해외망명길 찾아
만주 횡도천에 망명짐 풀다
만주에서 자치기관 경학사설립
척박한 환경, 경학사 중심의 한인사회 구축
경학사 부설 신흥강습소 설립
4부 만주에 세운 교육, 협동기관
광업사에 이어 자신계 조직
부여 옛 땅에 후예들이 부민단 창설
중국 정부 당국에 공한 보내
일제의 토지수탈, 만주이민 급속증가
이주동포 많아지자 활력 ‘만주기사’ 짓다
5부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 창설, 주지사 허가받아
신흥무관학교 교장맡아 경영책임
병기 구하지 못해 이론 교육으로
추위와 혹한에도 학도들 의기충천
졸업 후에는 신흥학우단으로
3500명 배출 무장투쟁 지도자로 활동
6부 남만주 동포에게 메시지
단군 옛터에서 희망을 양식삼고
망국족이지만 사람의 권리를 갖자
제군! 단체 만들어 힘을 기르도록
7부 무오독립선언 참여
대표급 39인과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주권불멸론’, 독립운동의 적통 내세워
국민의 ‘육탄혈전’을 촉구
8부 3·1혁명기의 활동
한족회와 군정부조직 책임 맡아
‘군정부’ 조직중 임정수립되자 ‘서로군정서’ 창설
아들보내 군자금 모으고 체코제 무기구입
게릴라전으로 일제에 타격
9부 무장독립전쟁 시기
만주독립군 봉오동, 청산리대첩 이뤄
봉오동, 청산리대첩의 역사적 평가
목에는 거액 현상금, 보복전에서 재기
10부 이승만 탄핵 이후
이승만의 위임통치론 극력반대
임시정부 의정원, 이승만 대통령 탄핵
결렬, 그러나 의미 있는 국민대표회의
박은식, 고별사에서 ‘이상룡 협조 요망’
11부 베이징의 조선공화정부
‘조선공화정부’ 이상룡을 대통령 추대
대통령추대 거부, 만주로 귀환
12부 임시정부의 수반
책 속에서
1894년은 국내외적으로 격변의 해였다. 동학농민혁명에 이어 일본군이 수원 부근 풍도에서 청국군함을 선제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정부의 갑오개혁, 동학군 2차봉기 등이 계속되었다. 이 땅의 남반부에서는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고, 북반부에서는 청일 양국군의 사활을 건 전쟁으로 피바다를 만들었다.
경술국치라는 미증유의 국난 속에서 이상룡은 단호했다. 많은 지식인과 민중들이 역사의 격변을 맞아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할 때 그는 추진해온 대로 해외 망명을 결행했다. 그동안 집안 일을 해온 머슴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가족들의 해외 이동과 정착에 소요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논밭과 집을 팔았다.
이상룡과 한인지도자들은 이주한인이 많아지면서 풍화시엔(通化縣을 중심으로 서간도 일대에 본격적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서둘렀다. 경학사가 해체된 이후 한인사회의 자치와 산업의 향상을 지도할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12년 가을 부민단이 조직되었다. “부여의 옛 영토에 부여의 후손들이 부흥결사를 세운다는 뜻”이 담겼다.
이상룡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재임할 때는 물론 퇴임 후에도 자신이 지은 『대동역사(大東歷史』를 교재로 우리 역사를 강의하였다. “1913년 이상룡은 만주지역 독립운동계 만이 아니라 그곳으로 이주해 오는 동료들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키고자 역사서를 저술했는네,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로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인들의 압박을 견디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氣’를 살려야 했다. 그는 『대동역사』를 편찬하였는데 이는 민족교육의 지침을 마련한 것이었다.”
아아, 제군들이여! 측간의 구더기가 똥을 즐기는 것은 그 더러움을 편안히 여겨서입니다. 골짜기의 새가 교목으로 옮겨 가는 이유는 밝은 것을 취한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들은 문을 닫고 깊숙이 거처하면서 외인(外人들을 접하지 않았기에 절로 이미 비루하고 열등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