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현대사학회 연구총서 간행사
책을 엮으며
제1부 장지동과 교육개혁 _이병인
제1장 장지동의 구상과 그 유산
제2장 『권학편』의 국가 중건 구상과 문화 전환
제3장 장지동과 계묘학제
제2부 『권학편(勸學篇』 _장지동
서문
권학편 상, 내편
제1장 단합된 마음 /同心
제2장 충성심 교육 /敎忠
제3장 윤리 확립 /明綱
제4장 정체성 인식 /知類
제5장 판단의 기준, 경전 /宗經
제6장 국가권력 확립 /正權
제7장 배움의 순서 /順序
제8장 학문의 핵심 학습법 /守約
제9장 아편 근절 /去毒
권학편 하, 외편
제1장 지혜 증진 /益智
제2장 유학 /游學
제3장 학당 설립 /設學
제4장 학제 /學制
제5장 번역 진흥 /廣譯
제6장 신문 열람 /閱報
제7장 제도 개혁 /變法
제8장 과거제도 개혁 /變科擧
제9장 농학, 공학, 상학 /農工商學
제10장 군사학 /兵學
제11장 광업학 /鑛學
제12장 철도 /鐵路
제13장 회통 /會通
제14장 군축론 비판 /非兵
제15장 종교적 관용 /非攻敎
제3부 계묘학제(癸卯學制의 학무강요(學務綱要_장백희 장지동 영경
편역을 마무리하며
참고자료 1 『권학편』에서 인용한 서적 소개
참고자료 2 『권학편』에서 언급한 인물 소개
찾아보기
위기를 몰랐기에 맞이한 근대 중국의 위기,
장지동의 진단
근대 사회로 변화하면서, 중국은 왜 서양 열강에 뒤처지고, 중국의 학문은 위기에 대응하지 못해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일까. 장지동은 중국이 여러 왕조를 거치며 하나로 통합된 이후 주변에 중국을 능가할 만한 경쟁 상대가 없으니, 문사 치장만을 중시하여 실력이 없어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은 지식의 개발이나 개혁을 하지 않고 옛 법을 그대로 지키며 간혹 수정하고 정돈해도 위기 없이 안심하고 유지할 수 있었으니 학문이 점차 쇠퇴했다. 그리고 아는 것이 없으니 할 일이 없으며, 하찮고 시시하게 일을 처리하여 졸렬하고 쓸모없는 것을 만들게 되었다. 중국이 인재가 넘쳐나던 때는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같이 경쟁이 상존하던 때였다. 경쟁이 인재를 키우고 지식을 개발하는 원천인데, 대일통(大一統을 이룬 이후 주변에 경쟁할 만한 국가가 없던 중국은 안일하게 대처하며 지식을 개발하지 않았다고 장지동은 주장했다.
중국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교육받은 인재의 힘
그는 군중의 힘을 신뢰하기보다는 국가만이 이해 갈등을 통제하고 공적인 이익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군중의 이익 다툼과 이기적 활동을 막을 대안을 국가에 대한 신뢰로 연결시켰다. 또한 국가가 국난을 극복하는 핵심은 인재의 유무라고 파악했고, 사대부가 국가 개혁의 중심에 설 것을 요구했다. 사대부가 사적 이익을 넘어 국가의 공익을 추구하는 개혁을 담당할 적임자였다.
장지동은 중국 학문이라는 문화적 가치를 강조했고, 이 외에도 신문, 철도 등을 통해 중국인의 국민 의식 강화를 추구했다. 그가 강조한 신문 열람은 견문을 넓히고 기개를 양성하며 불명확한 논설을 없애 식견이 좁은 선비, 들판의 농부 모두가 중국에 관한 소식을 보며 중국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장지동의 계묘학제,
중국 근대 교육체계를 56개 조문으로 만나다
1904년, 장지동은 1902년의 학제를 수정하여 새로운 학제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