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일통삼한 의식
신라의 영토의식과 삼한일통 의식 ┃ 윤경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려고 하였을까 ┃ 전덕재
‘일통삼한 의식’과 표상으로서의 ‘삼한’ ┃ 기경량
신라 ‘삼국통일’ 논쟁의 논점과 방향 ┃ 윤경진
김춘추, 당 태종의 협약과 ‘일통삼한’ ┃ 임기환
2부 전쟁과 외교, 그리고 교류
7세기 중·후반 동북아시아의 전쟁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 이재환
고구려-수·당 전쟁, 무엇을 바꾸었나? ┃ 이정빈
7세기 만주·한반도 전쟁과 지정학 구도의 재편 ┃ 여호규
7~8세기 나당 관계의 추이 ┃ 김종복
당의 입장에서 본 신라의 통일 ┃ 이기천
왜국(일본에서 본 백제·고구려의 멸망 ┃ 이재석
물질문화로 보는 삼국통일 ─ 고고학적 접근 ┃ 홍보식
삼국통일전쟁인가 vs 백제병합전쟁인가
당 태종이 신라에 주기로 했다는 ‘평양이남 백제토지’
648년 김춘추가 당에 건너가 당 태종을 만났다. 백제의 침략으로 인해 신라가 위험에 빠졌음을 알리고 청병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던 당 태종은 신라와 이해관계가 부합하면서 밀약을 맺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후에 ‘평양이남 백제토지’를 모두 신라에 주겠다는 협약이었다. 이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원문은 이렇다.
“我平定兩國 平壤已南百濟土地 乞 新羅 永爲安逸”
여기서 ‘평양이남(平壤已南 백제토지(百濟土地’의 문구 해석을 둘러싸고 크게 두 개의 학설로 나뉜다.
먼저, 삼국통일전쟁을 긍정하는 학자들은 ‘평양 이남의 고구려 토지와 백제 토지’ 또는 ‘(고구려 영토인 / 고구려 영역 가운데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로 해석하여 당 태종이 김춘추에게 약속한 것은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와 백제 토지였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7세기 중후반에 일어난 전쟁은 신라가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영토 일부까지 병합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본다. 또한 신라가 비록 고구려의 영역이나 주민을 제대로 포괄하지 못한 채 불완전한 통일을 이루었지만 당과 전쟁을 벌여 평양 이남 고구려 영역 일부를 신라의 군현으로 편제했음을 강조한다.
한편, 신라의 백제병합(통합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평양 이남의 백제 영토’, ‘평양 이남이 곧 백제 영토’, ‘평양(=고구려 이남의 백제 토지’라고 해석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신라는 당초 고구려를 통합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백제 병합만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삼국통일전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676년 신라와 당의 전쟁이 종결되었을 때 신라의 북쪽 경계는 임진강이었는데, 이는 원래 신라 지역과 백제 영토에 불과했으므로 7세기 중후반에 일어난 전쟁은 신라에 의한 백제병합전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특히 ‘평양 이남이 곧 백제 토지’라고 해석하는 학자는 대동강까지를 백제의 고유 영토로 인식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