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혼이 짓밟힌 어두운 시대, 그 속에서 방황한 예술가의 삶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에 관한 한 신동이자 천재였다. 그는 열세 살에 처음 작곡을 한 것으로 보이고, 열아홉 살에 첫 번째 교향곡을 완성했다. 피아노에도 재능을 보였는데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습도 제대로 하지 않고 연주 무대에 올라서 핀잔을 받는다. 20대 초중반에 작곡한 여러 교향곡과 고골을 각색한 오페라인 <코>로 이미 명성을 쌓은 쇼스타코비치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발표하며 대중적으로도 엄청난 인기를 누린다. 하지만 훗날 가장 높이 평가받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과 교향곡 4번은 정권에 의해 형식주의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고 요주의 인물이 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복무하지 않은 죄를 물은 것이다.
스탈린 정권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쇼스타코비치를 핍박하는데, 그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제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된 그를 체제 선전을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정권의 이중적인 행태 때문에 삶의 고비마다 위기를 겪기도 하고, 이득을 보기도 한다. 2차 대전 시기에는 선전 도구로 활용된 덕분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본인과 가족의 안정을 보장받았지만, 형식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어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에게 비난당하는 고초를 겪는다.
스탈린이 사라진 이후에도 처지는 비슷했다. 흐루쇼프 정권의 강압에 못 이겨 그는 공산당에 입당하는데, 이 때문에 사회적인 지위는 확보했지만 본인이 원치 않은 일들에 동원되어야 했고, 때로는 체제의 앞잡이로서 동료를 비난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태생적으로 정치 활동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시대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의 삶을 염두에 두고 그의 음악을 들으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만약 그가 시대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다면,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면 어떤 음악을 썼을까? 이 책의 후반부에서 그는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