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서북·관서·해서지방 출신자들이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
설립 목적과 취지는 자신들의 시대에 대한 사회진화론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서북학회 구성원들은 지금은 제국주의 시대로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나 민족이 힘이 약한 나라나 민족을 침탈하는 우승열패(優勝劣敗나 약육강식 논리만이 적용되는 시대로 열패자인 약자는 실력양성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기본 인식 위에 궁극목표는 국권회복·인권신장을 통하여 근대문명국가의 달성에 있었다. 민력양성을 위해 민력 결집은 시급한데, 방법은 단체설립과 단체 상호간의 단합으로 서북학회 설립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은 1907년 중엽에 이르러 관서와 관북지방에서 뿌리를 내려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되자 전 민족적 전 국가적 차원으로의 확산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강압책으로 국권회복운동이 더욱 어렵게 되자, 이러한 제약을 보다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1908년 1월 조직하였다. 구성원은 주로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다. 주요 임원은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박은식(朴殷植·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최재학(崔在學 등이었다. 임시회장 이동휘의 지도 하에 서우회관(西友會館에서 조직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회장으로 정운복(鄭雲復, 부회장 강윤희(姜玧熙, 총무 김달하(金達河를 선출하였다.
1909년에는 회장으로 오상규(吳相奎, 부회장 정운복, 총무 김명준(金明濬을 선출하였다. 조직은 서우학회·한북흥학회를 토대로 하였다. 서울에 총사무소를 두었으며, 회장 1명, 부회장 1명, 총무·부총무 각 1명, 평의원 30명, 사찰원(司察員, 회계 각 1명, 서기 2명이었다.
월보(月報 간행을 위해 주필 1명, 편집 1명, 협찬원(協贊員 19명을 두었다. 개별 사무를 처리할 때는 위원이나 총대(總代를 정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31개 지역에 지회를 설치하고 69개 지역에 지교(支校를 두었다.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학회령(學會令」 등 애국계몽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