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프롤로그
1. ‘잊힌 전쟁’의 기억을 찾아서
2. 전쟁 기억 읽어 가기
1부 종전의 여진, 전쟁의 망각과 시차
1장 철군, 종전, 전장의 재현
1. ‘개선의 수사’와 철군의 정치 경제
2. 전쟁의 스펙터클과 동원
3. 정치의 야만화
2장 뿌리가 뽑힌 사람들
1. 동원과 선택
2. 전쟁과 이산의 삶
3. 난민의 정치
3장 전쟁의 망각과 냉전 해체의 시차
1. 전쟁을 망각하는 국가
2. 냉전과 탈냉전의 겹침
3. 전쟁 기억과 참전군인의 동원
4장 냉전의 틈새, 베트남전쟁 다르게 보기
1. 남민전, 유신을 넘어 변혁을 꿈꾸다
2. 리영희의 ‘우회로’, 베트남전쟁
3. 1980년대 ‘혁명의 시대’, 베트남전쟁(혁명의 재인식
4. 번역과 혁명
2부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과거청산
5장 잊힌 전쟁 불러오기
1. 주변부 지역에서의 냉전과 탈냉전
2. 과거청산과 새로운 기억의 장 열기
3. 베트남인 생존자들의 전쟁과 삶
6장 기억에서 운동으로
1. 베트남전쟁 진실규명운동의 출발과 전개
2. 진실규명운동의 특성과 기억 투쟁 지형
3. 전쟁의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7장 초대에 의한 정의와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1. 지연된 정의와 부인하는 국가
2. 베트남전 과거청산운동의 변화와 재구성
3.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부인과 시인 사이
에필로그―기억의 전쟁, 냉전문화, 그리고 기억의 미래
참고문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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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젖줄, 독재 빌미 그리고 기억 너머로
1965년 2,000여 명의 군사원조단이 파견된 후 73년 주월한국군 사령부 해체식이 있기까지 8년여 동안 연인원 32만여 명의 군인, 6만여 명의 기술자가 베트남에 갔다. 5,000여 명의 군인이 전사, 순직, 사망했으며 베트남전 이후 제3국으로 떠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국가적으로도 베트남은 자유의 전장인 동시에 한 해 1억 8,000만 달러까지 벌어들이는 ‘수출 대어 줄’이었다. 또한 베트남전 종식은 박정희 정권이 ‘선안보 후민주론’을 앞세워 독재를 강화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각종 안보궐기대회가 잇따르고, 긴급조치 9호 선포, 학도호국단 재설치, 민방위 기본법 등 4대 전시입법이 그 결과였다. 반독재 유신 투쟁에 나섰던 남민전이 ‘코레콩’으로 불린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10 26 이후 들어선 군부정권하에서 베트남전은 철저히 잊혔다. 참전전우회는 해체됐고, 고엽자 피해자 구제도 방관했으며, 참전 군인들의 기록도 갖추지 못했다. 1992년 ‘제1회 파월의 날’ 기념행사에 참여했던 400여 명이 경부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인 것도 작은 해프닝에 그칠 정도였다.
시민평화법정에 의한 ‘초대에 의한 정의’
2부에선, 민주화 운동권에서 ‘혁명의 도구’로 소환되던 베트남전을 보는 시각이 90년대 말 이후 양민 학살을 중심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조명한다. 1998년 베트남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불행한 과거’를 언급했고, 2004년엔 노무현 대통령이 “마음의 빚이 있다”고 에둘러 사과했다. 지은이는 1999년 《한겨레21》이 벌인 “부끄러운 역사에 용서를 빌자”는 장기 캠페인이 ‘과거청산’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어 시민사회단체가 중심이 된 베트남전 진실규명운동,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은 2018년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이 열리는 것으로 결실을 맺었다. 베트남 생존자들의 한국 방문이 이뤄지고, 군이 내세우는 ‘상황 논리’를 극복하면서, 형사법정이 아닌 민사법정으로 진행된 시민평화법정은 “권력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