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주선을 쏘고, 버림받은 나환자(한센병를 껴안는 소록도 병원이 있는 고흥(高興반도의 면소재지도 아닌 촌마을에서 태어나 어느새 88세 미수(米壽가 되었다.
담대하고 열정적이던 우리 할아버지 완휴 현준(浣休現俊공은 한학과 농사에 매달리다가 약관 20살에 ‘중선배’라는 먼 바다에서 고기 잡던 큰 배를 사서 중국 상하이에서 약재를 사다 경동시장에 파는 무역업을 하여 거부가 되었다. 이 재력을 빈민구제에 널리 써서 자선사업가라는 소문이 자자하자 고종황제에게까지 보고되어 “효자정문비(孝子旌門碑를 세우도록 윤허를 받았는데 경위는 이렇다.”
구한말 최초의 국무총리였던 김홍집은 25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흥양(興陽:당시의 고흥이름 현감이 되어 부임했다. 그는 고흥군수를 하면서 고흥에서도 변두리 지역이던 관리(官里에 사는 완휴공이 부모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지내고 무덤 옆에 허름한 집을 지은 다음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내며 부모를 기리는 ‘시묘살이’를 할 정도로 효자라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했던 조선왕조에서는 이렇게 3년 상을 치루는 것을 가장 아름다운 장례로 치부했다. 그러나 ‘시묘살이’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돈과 건강이 허락되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시묘살이’는 부모만 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우리할아버지 완휴공은 9년 동안이나 할아버지까지 모시는 시묘살이를 하셨다.
고흥 군수였던 김홍집이 인사의례를 관장하는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오르자 그는 젊은 시절 지방관을 할 때 부모에게 효도하며 빈민들에게 정성을 쏟던 군민 완휴공에게 정문(旌門: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기 위해서 부락 입구에 세우던 붉은 문을 하사할 것을 고종황제에게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원래 정문은 국가에서 비용을 내서 세워주는 것이었지만, 당시 구한말은 국고가 말라 군수자리를 수만 냥씩 받고 팔아 국가예산으로 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돈을 내서 세워야만 했다. 그러자 우리 할아버지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면서 정문비 건립을 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