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옮긴이 후기
1835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열일곱 살의 카알 마르크스는 변호사인 아버지의 소원대로 고향 트리어에서 가까운 본 대학교 법과대학 학생이 된다. 다음 해 프로이센의 심장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을 계승한 에두아르드 간스, 헤겔 철학의 적대자 칼 폰 사비니 등의 강의를 들었고 19세기 독일 법학의 통칭에 해당하는 판덴텍 법학을 꾸준히 학습했다. 물론 당시 베를린의 정신을 지배한 헤겔 철학에 심취하면서 그의 정신세계는 법학에서 서서히 멀어졌고, 이는 곧 아버지의 소원에서 멀어져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보낸 한 장문의 편지에서는 민법 체계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내용을 설명하는가 하면 로마법 텍스트를 번역하는 중이라고 얘기하기도 하며, 나중에 행정법률가가 되어 대학 강단에 설 수도 있다는 꿈을 내비치기도 한다. 이 꿈이 순전히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한 아들의 ‘선한 거짓말’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838년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후 1841년에 공식적으로 베를린 법과대학의 제적생이 되고 같은 해에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법률가’ 마르크스는 중지미수에 머물게 된다.
1842년 철학박사 학위를 손에 쥐고 베를린에서 알게 된 멘토 브루노 바우어를 따라 본 대학으로 옮긴 마르크스는 학자의 길을 걷고자 했지만, 보수적인 프로이센 정부가 개혁적인 바우어를 본 대학 신학과 교수직에서 해임하면서 이 시도 역시 곧장 좌절되고 만다. 경제적 곤궁 상태에 있던 마르크스는 같은 해 스물네 살의 나이에 아놀드 루게가 창간한 급진적 개혁 성향의 「라인신문」 편집장이 된다. 마르크스는 매우 빠른 속도로 여러 편의 논설을 게재하게 되는데,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W』 1권의 서두를 장식하는 이 논설들의 제목을 잠시 살펴보자. 「최근 프로이센 검열령에 관한 언급」, 「제6차 라인 주의회 논의. 제1편: 언론자유와 주의회 토의의 공개에 관한 논쟁」, 「역사법학파의 철학적 선언」, 「제6차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