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죽지 말아야 할 네가 157년 전 이곳에 묻혔다. 그런 너를 구명하고자 내가 웃전에 진정을 올렸다. 웃전에서 네 처분을 고심할 동안 너는 이승과 저승,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로 잠들어 있었지. 허나 이제 조금은 기뻐해도 좋다. 드디어 처분이 내려졌다.”
“기뻐해도 좋다 함은……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입니까?”
저승사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번 죽은 자는 절대로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완전한 죽음을 잠시 보류할 뿐.”
현이 고개를 떨구었다. 삶에 대한 미련조차 어렴풋한 처지였으나 어쩐지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깨우는 날로부터 너는 백 일의 시간을 얻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스스로 너의 생을 기억해 내어라. 그리고 그 기억으로 그림을 완성해라. 그리하면 모든 한이 풀릴 것이다. 이것이 보류자의 숙명이니.”
--- pp.10~11
갑자기 스티커가 공중에 붕 뜨더니 스티커 조각이 하나씩 떨어져 여기저기 철썩 붙기 시작했다. 단비는 놀라서 다시 화면을 돌려보았다. 다시 보아도 똑같은 장면이었다. 계속 이어서 보았더니 이번에는 실내화가 저절로 몇 발자국 움직였고, 필통이 열렸고, 색연필이 저절로 움직이며 그림이 그려졌다. 얼음 조각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는 것처럼 단비의 등줄기에 차가운 소름이 돋았다. 투명 인간이라도 다녀간 걸까? 아니면 귀신?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단비는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버린 것이 아니오. 천 년 전은 더욱 아니고.”
단비가 소리 나는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몸은 고정한 채 고개만 아주 천천히. 그러고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희한한 옷을 입은 어떤 남자가 화구통을 들고 창고에서 나오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단비에게 물었다.
“그런데 초딩이 무엇이오?”
--- pp.61~62
현이 스케치북의 맨 마지막 장을 펴서 그때 기억을 그린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