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이런 실험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병원에 환자가 100명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딱 50명만을 정해 놓고 교인들이 집중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과연 성도들이 기도하는 환자 50명의 상태가 나머지 50명보다 더 빠르게 호전될까요? 이런 방법으로 기도의 효력을 검증할 수 있을까요? 물론 가능하다고 대답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실험으로 통계를 낼 수 없습니다. 아픈 자를 위한 기도는 진정한 회복을 바라며 하는 것이지 통계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실험은 그 자체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쪽은 낫기를 바라면서 다른 한쪽은 덜 낫기를 바란다면 기도의 동기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효력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기도를 마법이나 자동판매기 정도로 생각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성경에 기초한 ‘기도의 신학’이 필요합니다.
:: 12쪽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에스라는 무릎을 꿇고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죄 때문에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은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에 나라를 빼앗기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에스라는 이 모든 죄악을 회개하며 어둠이 물러가도록 기도합니다. 비록 지금껏 어둠이었지만 이제 빛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기도할까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중한 병에 걸려도 반드시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손을 들고 기도할까요? 무식한 사람이나 광신자라서 그렇습니까? 손 안 들고 조용히 기도해야 성숙한 지성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간절한 사람이 두 손을 드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나오고 싶을 때, 진정으로 빛이 되고 싶을 때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구별된 삶을 위해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기를 바랍니다.
:: 17-18쪽
기도할 때 주님께 ‘무엇이든지’ 구해도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