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여 명의 육체에 기생하는 의식〉, 〈고문받는 아내의 복제 데이터〉
거장들의 ‘영감의 원천’, 하드 SF만이 구현 가능한 미래서정
“주인공이 매일 아침 다른 사람 몸에서 깨어난다는 이 특이한 설정에 대해, 그는 독자가 만족할 만큼 수수께끼를 해명하면서도 결정적인 부분에서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과학적 이해로 채워질 자리에 대신 숭고의 감각을 채우는 것이다. 이러한 숭고함은 그의 거의 모든 작품 저류에 흐르고 있는 하드함과 상치되지 않으며,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인다. 그리하여 「대여금고」는 하드 SF 그 너머의 서정으로 나아간다.”
― 테드 창(소설가
전작 『내가 행복한 이유』의 키워드가 ‘경이감’과 ‘작가들의 작가’였다면, 이번 『대여금고』는 ‘(하드 SF만의 서정성’과 ‘거장들의 영감의 원천’일 것이다. 언뜻 서로 어울리지 않은 두 단어인 ‘하드 SF’와 ‘서정성’의 조합이란 굉장히 인상적으로 보인다. 다만, 그만큼이나 서로의 장점을 깎아 먹지는 않을까 우려가 들기도 하는데, 이러한 문제는 서정소설의 서정성과 『대여금고』의 서정성을 구분해서 볼 때 해결된다. 서정성을 획득하는 방식에서, 서정소설은 이미지가 주는 여운에 집중한다면, 『대여금고』는 과학적 상상력이 주는 여운에 집중한다. 이러한 특징은 표제작 「대여금고」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바로 이 여운을 확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학적 설명을 포기한다. 앞서 ‘인간 내면에 대한 섬세한 탐색’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대여금고」는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다른 사람 몸에 빙의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 남자에겐 자신만의 육체는커녕 삶도, 이름도 없다. 39년을 살아오면서 줄곧 그랬다. 그저 빌려 쓸 수 있는 특정 지역과 특정 연령대 남성들의 소유물이 전부다. 그리고 기생 존재로서의 삶을 기록해 둔 대여금고까지. 이러한 기생 존재의 삶에 어엿하게 적응한 주인공.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숙주의 몸 속에 빙의한다. 그 숙주는 우연히도 정신의학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