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의 말 :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한 덕수궁
저자의 말 : 정동길을 따라 덕수궁의 역사를 묻다
‘개정판’ 저자의 말 : 복원과 함께 제 모습을 찾아가는 덕수궁
1. 환구단 가는 길
2. 대한문으로 들어가다
3. 중화전, 자립의지의 상징
4. 석어당, 임금이 머물렀던 집
6. 함녕전과 덕홍전, 황제의 공간
7. 정관헌, 커피향이 흐르다
5. 즉조당과 준명당, 덕수궁의 모태
8. 석조전, 황제가 꿈꾼 근대화
9. 돈덕전, 순종 황제 즉위하다
10. 덕수궁을 돌아나오는 길목에서
11. 근대 역사의 정동길을 걷다
부록 : 덕수궁 십경 / 정동길 십경 / 조선왕조 가계도 / 덕수궁 연표
1. 정릉동 행궁에서 경운궁으로, 그리고 덕수궁까지
덕수궁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궁궐로, 정릉동 행궁으로까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문을 지나 중화문을 통해 중화전 영역에 들어서면 그 뒤편에 단청을 하지 않은 2층 집이 웅장하게 서 있다. 덕수궁의 뿌리가 되는 ‘석어당’이라는 건물이다. 원래 조선왕조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가 있던 이곳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환도 후에 머물게 되면서 행궁이 되었다. 이곳에서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정릉동 행궁으로 부르던 이곳을 ‘경운궁’이라고 정식 궁궐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후 조선의 왕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정궁으로 사용했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았다.
그러던 중 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고종의 왕후 민씨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경운궁은 근대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하게 된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후에 순종를 데리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게 되었고, 곧바로 경운궁을 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동 일대에는 러시아,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각국 외교사절의 공관이 있었고, 선교사들이 많이 모여 살던 외국인 거주지였다.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후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영광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궁궐이 되었다.
2. 환구단에서 시작하여 정동길을 따라 걷는 덕수궁 여행
1897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환구단’을 지었다. 중국 사신을 위한 숙소나 연회장으로 사용되던 남별궁 자리에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새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중국 황제가 내린 국새를 버리고 대한제국과 황제를 상징하는 대한국새를 제작했다. 이후 민족자존의 상징이 되었던 환구단은 한일병합으로 일제강점기가 들어서면서 1913년에 헐리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호텔(지금의 웨스틴 조선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