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安龍福과 元祿覺書 서문
제1절 두 조선인의 연행
【원록의 죽도와 송도】
【사건의 시작(5년 2월】
【사건 후】
【조선인의 연행(원록 6년 2월∼4월】
【오키의 취조】
【울릉도에 도해한 조선인 일단】
【요나고(米子에서의 구술서】
【두 조선인의 소지품 검사】
【안헨치우의 목찰】
【선운과 항만의 발달】
【토라헤의 목찰】
【조선 측의 해역사정】
【죽도에서 오키로 가는 길】
【죽도에 대한 정보】
【막부 순견사에 대한 답변】
【톳토리번의 섬에 대한 인식】
【막부의 섬 인식】
제2절 두 조선인의 나가사키 송부
【요나고의 두 조선인】
【월번노중에게 보고(원록 6년 4월∼5월】
【섬의 관리】
【조선인의 톳토리 이송】
【톳토리 성하의 두 조선인】
【육로여행】
【나가사키로 가는 길】
【장군과의 접촉】
【쓰시마번에 연락】
【쓰시마의 사자】
【나가사키에서의 조선인 양도】
【두 조선인의 진술】
【쓰시마의 정보탐색】
【쓰시마번의 영호사자】
제3절 대차사의 외교교섭
【쓰시마의 취조】
【소우 요시자네의 위구】
【정사의 파견】
【교섭의 시작】
【정관과 접위관의 교섭】
【조선의 복서】
【조선의 정권교대】
【제2차 교섭의 개시】
【제2차의 복서】
【쓰시마번주의 교대】
【의문 4개조의 정시】
【의문 4개조에 대한 회답】
【반답서에 대한 반론】
【외교교섭의 파탄】
【에도로 가는 신 노선】
【예비 탐사선의 파견】
【섬을 중개로 하는 도항로】
【새로운 전개】
제4절 원록각서 자료(元書 資料
【서】
【本文 1】~【本文 31】
제5절 원록각서(元書 해설
【도해의 선단】
【도해 일행의 승원들】
【금오승장 뇌헌】
【승려의 항해】
【울릉도 해역의 지식】
【바다활동의 진전】
【울릉도의 출발】
【안용복의 송도지식】
【송도에서 오키로】
【두 개의 우산도】
【안용복의 소송】
【안용복의 귀국 후의 답변】
【항해의 지령】
【부산첨사의 힘】
제6절
2005년 2월, 일본 시마네(島根현 무라카미(村上 가문의 고택 창고에서 고문서 하나가 발견되었다. 『원록구 병자년 조선주착안 일주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舟之覺書』(이하 원록각서라는 제목의 15페이지 남짓한 이 고문서는, 1696년(숙종 22년 5월 일본 어선의 독도 출어에 항의하기 위해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한 안용복을 일본 지방 관리가 취조해 막부 직할령인 이와미(石見주에 보고한 기록이다.
31단으로 나눌 수 있는 『원록각서』는 11인 일행의 구성, 울릉도에 도해한 13척의 선단, 울릉도와 자산도의 지리적 설명, 동행한 승려에 대한 설명, 일행과 대관소의 교류와 신뢰관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록각서』에 의하면 안용복은 「조선팔도지도」를 보이며 “‘다케시마(竹島’는 울릉도, 마쓰시마는 자산(당시 독도의 조선명으로 모두 강원도에 속한 섬”이라고 설명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전까지 발견된 일본 자료에서는 ‘자산(또는 우산도 于山島’이 어느 섬인지 분명치 않은 점을 들어 안용복을 난폭한 문맹자로 단정하고, 『숙종실록』 등 안용복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허위라 주장해 왔다. 그러나 『원록각서』에 따르면 안용복은 기록을 중시하며 상대를 배려하는 인격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대관은 안용복 일행과 나눈 이야기를 대담 문답으로 표기할 정도로 예우하고 있다. 안용복은 또, “다케시마와 조선은 30리, 다케시마와 마쓰시마는 50리”라고 위치를 설명하여 울릉도와 죽도를 가리키는 말임을 분명히 하였다. 또 이 기록의 끝에 조선8도가 적혀 있고, 강원도에는 주석으로 “이 도에는 다케시마와 마쓰시마가 속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일본이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독도문제의 첫걸음은 조선의 독도인식이나 조선기록의 허실을 점검하는 일로 독도문제의 본질을 규명하는 일이다. 『원록각서』는 17세기의 독도문제를 논하는 데 있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근거로 하는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었다. 오오니시 토시테루와 권정이 함께 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