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흥학보』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 있던 한국 학생들이 조직한 태극학회·대한학회·공수학회·연학회 등을 통합한 대한흥학회가 발행하였다. 『대한흥학보』는 각 유학생 단체가 발행하던 기관지를 계승한 것으로 “대한흥학회의 최대 기관”, 즉 중심 사업이었다. 『대한흥학보』의 발행인은 고원훈, 편집인은 조용은이었으며, 도쿄 유학생 감독부 안에 위치하였다. 1909년 1월 17일 대한흥학회 임시 평의회에서 『대한흥학보』를 2월 초순 출간하기로 결정하였으나 1개월 후인 3월 20일 발행되었다.
『대한흥학보』 제1호부터 제6호까지는 연단(演壇, 학해(學海, 사전(史傳, 문원(文苑, 사조(詞藻, 잡찬(雜纂, 휘보(彙報, 회록(會錄 등으로 구성되었으나 제7호부터는 논자(論者, 학예(學藝, 전기(傳記, 문원, 시보(時報, 부록(附錄으로 구성을 변경하였다.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은 연단, 학예, 잡찬이었다. 『대한흥학보』에 게재된 주된 내용은 사회 계몽에 관계되는 것과 자연 과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과 관련된 내용, 유학생들의 소식 등이다. 특히 구호를 나열하기보다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대한흥학보』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대한흥학보』는 창간호 발행 이래 1910년 5월 폐간될 때까지 방학을 제외하고 매월 발행되었다. 창간호의 발행 부수가 2,000부였으나 증간 요구가 있었으므로 2,000~2,500부 정도 발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9년 9월 말 『대한흥학보』의 구독자 수는 경기도 59명, 전라도 39명, 강원도 88명, 함경도 120명, 충청도 15명, 경상도 28명, 황해도 60명, 평안도 178명으로 모두 508명으로서 평안도와 함경도의 구독자 수가 과반을 차지하였다. 구독자의 과반이 평안도와 함경도에 있는 것은 대한흥학회의 지부가 해당 지역에 설치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국내의 각 학교와 지식인에게 무료로 발송하는 것이 1,500부 이상이었다. 『대한흥학보』 발간의 자금은 회원들의 회비와 의연금, 국내 인사의 찬성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