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의 글 _‘한겨레역사인물평전’을 기획하며 (정출헌|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점필재연구소 소장
머리말 _배제된 타자의 봉인을 열다
1장 관료로 내딛은 첫발, 그 신중한 한 걸음
당돌한 아이, 명문 반가에 발 들이다|과거 급제, 고종과의 첫 만남|육영공원 입학, 신문물을 익히다|급변하는 정세 속에 결행한 미국행|서양의 눈에 비친 우리, 그 조선을 돌아보다|자못 신중한 행보, 뜻 펼칠 때를 기다리다
2장 충성스러운 신하에서 기민한 정치인으로
갑오개혁, 급박한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서|정동파의 입각, 그리고 친일 세력의 척결|성균관 개혁과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친미파 수장으로 정치적 도박을 시작하다|정쟁을 가르며, 축출과 제휴를 거듭하며
3장 정계의 중심에서 세상과 만나다
보수 세력과 고종의 틈바구니에서|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세력 결집을 시도하다|정계의 주도권 다툼, 그리고 고종의 환궁|고종과의 대립, 뒤이은 중앙 정계에서의 퇴출|러시아 견제의 배후 세력으로 재기를 노리다|상반된 평판의 기로에 서서
4장 정계 밖에서 설움을 겪다
지방의 부정부패와 민심의 이반 가운데서|정계에서 물러났으나 무시할 수 없는 정치인으로|시세를 관망하며 재기를 기다리다|정계의 혼란, 그리고 다시 찾아온 기회
5장 애국과 매국의 갈림길에서
대한제국 점령을 위한 일본의 압박이 시작되다|누구도 찬성하지 않았으나 체결된 을사조약|조약 체결의 책임은 누구에게?|합리성과 실용성을 갖춘 역적의 논리, 사회에 침윤되다
6장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친일로 나아가다
노련한 정치 편력으로 입지를 강화하다|신중한 개혁 노선의 표방, 그리고 제국의 분열|대한제국 통치권의 상징, 사법권이 일제의 손으로|정치적 위기, 칼을 맞고 쓰러지다|한 달간의 고민, 그리고 결단|의리와 매국 사이에서
7장 권력의 정점에서 지탄의 절정으로
병합의 회오리 속에서 조선 상류층의 버팀목이 되다|일본인과의 인맥 형성을 통해 구가한 화려한 시절|격렬한 저항 운동의 발발, 내선융
우리가 몰랐던 이완용?
구한말 근왕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개혁 성향을 드러냈던 관료, 이완용
일반적으로 이완용은 매국노, 친일파, 혹은 변신의 귀재 등으로 낙인찍혀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잠시 유보해두고 그의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이제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흥미로운 사실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명문 반가에 양자로 들어가서 스물다섯에 과거에 급제한 이완용은 관직 생활을 시작한 지 5개월이 지나 육영공원에 입학한다.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었던 육영공원은 영어 등 신문물을 가르쳤지만, 이 신식 학교의 입학생들은 정부의 명령이나 주변 사람의 권유로 들어온 고위 관료 자제들이 많았다. 반면에 이완용은 전통 학문만으로는 시세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자발적으로 육영공원에 입학했다. 이러한 식견은 당시 미국에 대한 짝사랑이 대단했던 고종의 의중을 꿰뚫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이완용은 조선에서 맨 처음 주미공사를 파견했을 때 참찬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는 미국이라는 문명화된 사회를 목도하면서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춰 나갔다. 귀국 후 제3차 갑오내각 때 학부대신으로 등용된 이완용은 미국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인민 교육을 위한 체제를 정비하고 이를 실행한다. 그의 손을 거치면서 근대적 초등교육기관을 비롯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인 한성사범학교의 관제도 개정되었다.
이완용은 왕이 부재하는 미국의 정치 체제를 일견하고 돌아왔으나 공화정이나 입헌군주제 같은 변화를 주장하는 급진성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계가 혼란스러울 때 주도 세력과 거리를 두면서 절대군주인 왕의 의중을 헤아려 자신의 행보를 조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갑오내각 당시 그는 명문 반가 출신답게 군신(君臣의 예를 지키는 근왕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고 교육을 진작시킴으로써 조선의 점진적 개혁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완용은 당시 조선 정계에서 개혁적 관료로 지목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