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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설의 주가 되는 「금강경」은 대략 서기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에 성립된 공(空사상의 기초가 되는 반야경전이다. 공사상을 설명하면서도 공 자를 쓰지 않는 특이한 경전의 원명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인도 사위국 배경으로 석가모니 붓다께서 제자 수부티를 상대로 설한 경이다.
그 요지를 살펴보면 이렇다.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고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일으켜라.
붓다를 모양으로 보지 말고 모양이 없는 진리로서 붓다를 깨달아야 한다.
모든 모습은 모양이 없으며 그렇게 본다면 곧 진리인 붓다를 보게 된다.
특히 다음과 같은 구절 속에 「금강경」의 요지가 잘 드러나 있다.
‘만약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
‘보살의 수레를 일으켜 나아가려는 자를 위한다고 이름할 얼마간의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無有少法名發趣菩薩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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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원고를 출판사가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금강경」을 소설로 형상화한 작품이 전무하다시피 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사실 「금강경」이 소설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편집진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소설이 완성되었다고 하니까 어떻게 썼을지 궁금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때문은 아니었다.
이 작품이 편집부의 시선을 끈 것은 지금까지 나온 「금강경」과는 쾌를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뜻있는 이들이 하나같이 판에 박은 듯「금강경」을 해석하여 내놓는 마당에 그와 쾌를 같이 한다면 책을 낼 의미가 없었다. 「금강경」의 전문을 들여놓고 어귀나 푼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타의 해설서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 핵심에 다가들 수 없다면 도를 빙자한 잡화(雜話와 다를 바 없다.
먼저 소설을 읽고 느낀 점을 들어보면, 첫째, 종래의 「금강경」에 대한 해석서들이 무비판적인 데 반해 이 소설은 악승(惡僧의 시선을 통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둘째, 악승과 악비의 만남을 통해 구도의 문제를 상사(想思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