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파편화된 인식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통합하는 “나”가 있다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천사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이다
여기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이 겪은 모든 순간의 모든 장면을 이파리 한 장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지만, 이 순간을 다음 순간과 연결하지 못한다. 하루를 회상하는 데에는 또다른 하루가 꼬박 걸리며, 한 마리 개의 앞얼굴과 옆얼굴은 같은 개체의 것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소설 「기억력의 천재 푸네스」는 이처럼 감각 세계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지각하지만 그것을 선별하고 조합하지 못하는 인물 푸네스를 통해 “자아”와 “실재”의 관계에 대해서 묻는다. ‘만일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시공간의 편린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실재를 탐구할 수 있는가?’
이는 시공간상으로 통일된 “자아”를 발견한 칸트의 철학과 연결된다. 세계는 실제로 푸네스의 세상처럼 단절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통일된 자아를 통해서 그것들을 인과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즉 자아는 그 자체로는 경험할 수 없지만,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자아를 통해서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러 명제 중 우리의 상식에 부합하는 것만을 취해서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칸트는 이처럼 우리가 이해한 방식을 세계 그 자체라고 생각할 때, 우리가 우상을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불러온 반발 또한 우리가 시공간을 통해 총체적인 실재를 파악할 수 있다고 가정한 결과였다. 시공간의 연속성을 가정한 고전물리학과 달리, 양자의 세계에는 불연속성과 단절만이 존재했다. 전자는 중간에 여행한 흔적도 없이 새로운 궤도에 나타났고, 탐지될 때까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다가 탐지된 순간에야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를 “결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전적인 과학의 세계관을 뿌리째 뒤흔드는 그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