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역사의 현장에서 ‘도서관’은 무엇인가?
1부 도서관의 정치학
우리가 유서 깊은 대학도서관을 갖지 못한 이유: 성균관 존경각
‘용산 대폭격’으로 사라진 식민지 조선의 3대 도서관: 철도도서관
친일파 동상이 도서관에 서 있는 이유: 종로도서관
김일성은 왜 서울대 도서관 책을 가져가려 했을까?: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도서관 이름에 새겨진 ‘박통’의 흔적: 정독도서관
공수처 비판으로 소환된 ‘사직동팀’의 추억: 서울특별시교육청어린이도서관
도서관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는가?: 용산도서관
말죽거리, 신화와 잔혹사 사이에서: 도곡정보문화도서관
2부 혁명과 민주화 투쟁의 무대
‘도서관’을 통해 국권을 되찾고자 했던 시도: 우현서루와 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
이승만에게 도서관 이름을 바친 대학 총장: 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
‘혁명’을 기념하는 단 하나의 도서관: 4·19혁명기념도서관
유신 체제의 종말을 부른 부마민주항쟁의 불꽃: 부산대·동아대·경남대 도서관
‘스파르타의 300’은 알지만, ‘광주의 300’은 모르는 당신에게: 빛고을 광주의 도서관
‘도서관 점거 농성’은 어떻게 ‘6월 항쟁’으로 이어졌나?: 서울특별시청 을지로별관
‘대학의 심장’이 초토화된 사건: 건국대학교 언어교육원
도서관이 ‘민주주의 보루’였던 시절은 언제일까?: 도서관 앞 광장
3부 제국부터 민국까지, 국가도서관 이야기
조선은 왜 ‘쉽게’ 망했을까?: 경복궁 집옥재
도서관으로 흥한 나라, 도서관에서 망한 나라: 덕수궁 중명전
‘책 없는 도서관’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조선총독부도서관
‘제국의 사서’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인가?: 국립도서관
국가도서관에 자리한 독재자의 ‘하사품’: 국립중앙도서관
의회는 왜 ‘도서관’이 필요할까?: 국회도서관
한반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평양에 있는 이유: 인민대학습당
4부 사서도 모르는 도서관의 숨은 역사
최초의 ‘사서’를 찾아서: 경성도서관과 경성부립도서관 옛터
도서관이 ‘산’으로 간
도서관, 투쟁과 민주화의 무대가 되다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는 민주화다. 민주주의의 정착은 해방 이후 오랜 독재·군사 정권에 맞서 벌인 치열한 투쟁의 결과다. 민주화 운동의 무대 하면 시청·도청 같은 관공서나 광장·공원·시장 같은 공공장소가 먼저 떠오른다. 최근에는 비상계엄과 내란의 위협을 막아낸 여의도 국회 앞과 응원봉 집회의 광화문이 있다. 하지만 이들 못지않게 ‘민주주의의 보루’가 되었던 도서관들이 있다. 어느 곳보다 정적이고 고요했지만 시대의 요구에 따라 격렬하게 요동쳤던 도서관들은 과연 어디일까?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유권자 매수와 깡패 동원, 대리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등 불법 선거를 자행했다. 마산에서 시작된 항의 시위는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고 4월 19일 이승만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시민 저항이 거세지자 마침내 이승만은 대통령 사임 성명을 발표했다. 부정 선거의 주역 이기붕이 살던 저택은 이후 4·19 혁명 유족 단체가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되었다. 혁명을 기념하는 도서관이 자리하기에 이보다 더 상징적인 곳은 없을 것이다.(165쪽
1970년대 들어 한국은 경제적 풍요를 누렸지만 동시에 자유와 권리가 가장 제한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 때문이었다. 1979년 10월 부산대·동아대·경남대 재학생들은 각 학교의 중앙도서관에서 유신 철폐 시위를 시작했다. 규모가 커지고 시민들이 합류하고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학생 시위’는 ‘민중 항쟁’으로 바뀌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디딤돌’로 평가받는 부산마산민주항쟁의 시작이었다. 왜 대학도서관이 항쟁의 시발점이 되었을까? “학우여!”의 ‘학’자만 외쳐도 경찰과 정보기관원이 달려드는 상황에서, 대학도서관은 학생들이 공개적으로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175쪽
1980년에도 전두환의 신군부에 맞선 민주화 운동이 거셌다. 5월 21일 옛 전남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