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초로 탄생한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 러시아 연해주 1905년~1919년
연해주, 독립운동의 영웅들이 모여들다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다
의병들은 모두 모여라, 13도의군
권업회, 연해주 한인을 하나로 묶다
새로운 시대를 열자! 전로한족회중앙총회
3ㆍ1운동이 들불처럼 타오르다
대한국민의회, 최초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다
동방을 지배하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기념비
2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다 | 중국 상하이 1919년 4월~1932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에 가다
대한국민의회,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 한성임시정부
안창호, 세 개의 임정을 통합정부로 만들다
단둥의 교통국 이륭양행, 파란 눈의 영웅 조지 쇼
임시정부에서 탄핵이 있었다
한인애국단, 의열 투쟁으로 돌파구를 열다
의친왕 이강, 상하이 망명을 시도하다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뼈가 있고 피가 있다면 조선의 투사가 되어라.”
만국공묘,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는 어디에?
상하이의 상징 와이탄과 둥팡밍주
3 임정과 김구의 피난 시절 | 중국 자싱과 항저우 1932년 5월~1935년 11월
‘현상금 58억’ 김구를 잡아라
주푸청과 조지 애시모어 피치의 미?중 합작 비밀 작전
김구와 주아이바오의 가짜 부부생활
김구, 장제스에게 군인 양성을 요청하다
“상하이의 정원은 싫다. 중국의 정원이고 싶다.”
항저우에서 안중근과 김구를 다시 새기다
4 수로 3,000리 육로 3,000리 | 임시정부 이동 시기 1935년 11월~1939년 4월
중일전쟁이 일어나다
난무팅의 총성, 김구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다
땅 위에서 물 위에서 기차와 배로
충칭을 코앞에 두고 임정의 큰 별이 지다
제비도 못 넘는다는 바쑤웨와 장준하
5 임시정부의 황금기 | 중국 충칭 1940년 9월~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렌화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식 군대, 한국광복군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와
통합 임시정부의 역사와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이 책은 우리나라 임시정부의 역사가 러시아 연해주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당시 러시아 연해주는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국내에서 더는 독립투쟁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애국지사가 만주의 간도를 지나 연해주로 넘어왔다. 헤이그 특사였던 이상설과 이준, 의병을 이끌고 온 의병장 유인석과 이범윤, 미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던 안창호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가 모여든 것이다. 최재형과 동의회가 준비하여 실행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로 연해주에서의 독립투쟁의 기세는 드높았다. 1919년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국내의 3?1만세운동에 이어 3월 17일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세워지고 독립선언서가 선포된 것이다.
이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모인 애국지사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선포하고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각료 명단을 발표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4월 23일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대회를 열면서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포문과 약법, 각료 명단을 발표한다. 이렇게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상하이, 국내에서 각각 수립된 임정들을 통합하는 데는 안창호가 앞장섰다. 단절된 민족 정권을 계승한 하나의 정부를 세우고 국내외의 항일독립운동을 강건하게 진행해 나가기 위해서였다. 1919년 9월 11일 세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고,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표하며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등 각료 명단도 발표하였다.
이후 자주독립과 애국을 앞세운 임정의 길은 험난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고, 임정 내부의 파벌 갈등과 수많은 애국지사의 투옥과 사망 등 산적한 어려움 속에서도 임정은 27년간 꿋꿋이 버티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첫 청사는 상하이에 자리 잡았지만, 1932년 이후 자싱, 항저우, 난징, 창사, 충칭 등으로 머나먼 여정을 떠나야 했고, 김구는